나의 이야기

[스크랩] 폐허에 핀 꽃

송명 2012. 4. 22. 00:18

 

 

   6.25 동란 전쟁으로 말미암아  전국의 포성의 화마로  전국토가 폐허가 되고 

   화마가 할퀴고 간 자리에 연로한 부모님과 삼남매을 훌륭하게 키워온

   한 아낙네의 실화입니다. 

 

   6.25동란이후 겨울난리 즉, 국군이 진격하여 북진할때 

   전쟁터가 되었던 한 시골마을 

   한 정찰기가 하늘에서 잠간 멈추었다가 가면  여지없이 포격이 시작되고 

 

   그때 정찰기는 이름하여 곰배팔이 비행기!!!

   [밑에서 볼대에는 한족날개가 작게 보이기 때문에 

   곰배팔비행기라고  민초들이 명명한이름, 그때는 무슨 포격인줄도

   몰랐지만 지금생각하면  155미리 포인것 같음]

 

   때는 10월중순 정찰기 한대가 와서 정찰한후 돌아갔다.

   사람들은 이 정찰기가 왔다갔으니 포사격이 시작될 것이다.

   그날 오후 쫒기는 괴뢰군 인민군들이 우리 마을로 들어왔다.

   동네사람들은 필시 전쟁마당이 될 것이라고 너도 나도 피난길에 올랐다.

   주인공의 남편 백상기도 서둘러 피난길로 올랐다. 

 

   주인공인 희정도 연로하신 부모님과 딸하나, 아들 둘 자식들을 데리고

   허둥지둥 집을 뛰쳐 나가보니 마을사람들은 일부는 뒷동산으로 

   일부는 강가 언덕밑에 모여있었다.

 

   김희정씨도 집안 아주머니와 같이 이불 [솜이불]을 가지고  강가로 나가보니

   동네 아주머니들이 강가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엎드려 있었다.

 

   희정씨도 생각할 여지도 없이 거기에 같이가서 엎드렸다.

   조금있으니  하늘에선 비행기가, 강건너에서는 국군이,

   강 이쪽마을에서는 인민군들이 서로 총을 쏘면서 격전이 한참이였다.

   죽은 사람도 많았고, 목이 날아간 사람, 창자가 밖으로 나와서 죽은사람,

   강을 건너다 죽은사람, 여기서도 백성들의 죽음, 저기서도 민초들의 죽음,

   무슨 약이 있을 손가.......

 

   사람이 죽어도 손한번 쓸수 없는 상황,

   전투는 밤이 다가오고 새벽이 될 무렵에야 끝이났다

 

   인민군들은  밤에 북으로, 북으로 도망가고,  국군들은 북으로, 북으로 진격하고

   이곳 마을은  한참만에 고요가 찿아왔다. 

 

   모두가 자기 가족 찿기에 바빴다.

   동네사람들도 희생이 많았다.

 

   희정씨도 가족을 찿아보았다.

   다행히도 다친사람도 없고, 가족이 무사했다

   부모님을 모시고 집으로 돌아 왔지만 집은 간 곳이 없고, 잿더미만 남았다.

   동네집마을이 이십여호나 동네에 집들이 한채도 남지 않았다. 

 

   당작 무엇을 먹으며, 어디서 잠을 자며, 어떻게 살것인가.

   참으로 막막하여 어찌하여야 될 것인가.

   도무지 생각이 나질않았다.

 

   다행이도 전날 남편이 피난길에 오르면서 올해 농사 지은 수수, 조, 옥수수, 콩 등을

   부엌에 뭍어 놓고 떠났는데, 집이 타면서 곡식도 많이 탔다.

   부엌땅속에 단지를 묻었는데, 타다가 만 곡식이 그래도 많이 남아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죽은 사람을 장사(장례)지내고, 

   소, 돼지, 닭 들도 피난을 못하고,  외양간에 죽은 소도 있고,

   난리통이라, 소도 임자가 없었다.

 

   보는 사람이 임자이고, 무조건 남의 소도 잡아 먹는 실정.

   사람도 죽는 마당에 가축이 무슨 소용인가.

 

   희정씨는 늙으신 시아버지을 모시고, 당장 살 집을 마련하기로하고,

   흙으로 토담집을 마련하기로 하고 무너진 집터를 다듬은 자리에

   노인은 흙을 이기고, 며느리는 돌을 날라와서 집을 짓는데,

   토담집에 통칸으로 만들었다.

   여러개의 방을 만들 마음에 여유가 없었다. 

 

   조금 있으면 겨울이라, 얼어 죽지는 말아야 하지 않은가.

   어린 자식과 늙으신 부모님 봉양에 온 힘을 기울인 후 

   양식은 타다가 만 잡곡을 매일 죽을 쑤워먹으며,

   조당수며, 강냉이당숙을[옥수수죽, 조쌀죽]으로 연명하며 겨울을

   지내야만 했다.

 

   피난길에 오른 남편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도 없고,

   동네에서 같이 떠난 사람도 십명 정도 되는데 하나같이소식이 없다.

 

   이럭 저럭 지내다보니 겨울이왔다.

   양식은 잡곡으로 끼니를 때우지만 땔깜이 문제였다.

   여자 혼자 힘으로 어찌 땔깜을 충당하겠는가.

 

   겨울이 되니까,  여기저기서 염병이 돌았다.

   전쟁으로 죽은사람보다 염병으로 죽은 사람이 많았다.

 

   행인지, 불행인지는 몰라도 희정씨 가족은 하나도 병에 걸린 사람이 없었다.

   소고기와 남에 살이라도 막 훔쳐 먹은 사람들은 염병에 고생했고,

   죽은 사람도 많았다.

   지금 생각하여 보면 그때에 잘먹지 못하였기때문에 그런병에 걸리지 않은것같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그 해에 겨울에 눈이 많이왔다.

   눈이 왔다하면 한질(사람 키만큼)!!!

   3일이 멀다하고 눈이왔다.

   온천지 가히 도화지(종이)같다.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왜 이렇게 눈이 많이 오는걸까

   땔깜이 없어 굶기도 했다.

   지금은 석유도 있고, 연탄도 있지만, 그시절엔 산에 나무을 베어 오는것이

   유일한 생활방식이었다.

 

   여자의 몸으로 나무를 베어오려니 그 고생이 얼마컸겠는가

   매일 매일 산에서 고생하다보니 봄이 돌아오고 평화도 찿아왔다.

 

   한국은 총선거를 실시하여 엄연한 민주국가로 발전하고,  

   국민들도 차츰 자리도 잡히고, 생활의 터전도 잡혔다.

 

   밭을 갈아 씨앗도 뿌리고, 논을 갈아 벼도 심고,

   나름대로 평화도 오고, 행복도 왔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엔 피난간 동네사람들과 남편에 행방이 묘연했다.

   큰아들이 많이 자라서 초등학교에 입학할때가 되었다.

 

   남편은 없지만 자식들은 잘키우리라 마음먹고, 시어머니와 같이

   십리길이나 떨어진 국민학교에 입학시키고 돌아오는것이 얼마나 가슴이 뿌듯하고,

   흐믓한 일인지........

   나는 배우지 못했지만 자식만은 가르치리라 굳게 다짐했다. 

 

   아이들은 별탈없이 잘자라주고 있었다.

   남편을 닮았는지 공부도 잘하고 있었다.

 

   세월이 흘러 남편과 헤어진지도 3년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런데 남편이 돌아온다는 소식이 왔다. 

 

   피난길에 올랐던 남편은 동네사람들과 함께 미군들에게 붙들리고 말았다.

   말이 통하지 않은 관계로 거제도 피난민수용소에 수용된후 소식을 전할길 없어

   못하다가 풀려난다는 소식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참고, 고생하며 기다린 보람으로 남편을 다시 만나

   행복한 살림을 다시 시작하면서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이 모두가 조상님께서 돌보심이 아닐까?

                               

                                      지은이  송명 [영옥]

 

 

 

출처 : 단양우씨 집의공파 종친회
글쓴이 : 송명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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