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 보따리/옛 노래 이야기

[스크랩] 박재홍 (朴載弘)

송명 2013. 1. 2. 16:12

 


박재홍


1924년 4월 7일 생으로
토목건설 청부업을 하는 아버지의 두형제중 장남으로
경기도 시흥군 동면 시흥리 109번지에서 태어났다

 

시흥에서 보통학교를 다니다 토목건설을 하는 아버지를따라
3학년 때 함경남도 함흥에 있는 신흥 보통학교로 전학을 간 후
아버지의 사업장을 따라
여러 군데로 전전 하면서 학교를 옮겨 다녔다고 한다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 하기는 했으나
역시 아버지의 사업장을 따라서 전전하는 동안에
학업을 제대로 계속 하지 못하고
단계 수력 발전소, 수풍 수력 발전소 등에서
전기 기술을 습득 하기도 했지만
청년시절 은행원으로 잠시 근무하였다고 한다

 

1945년 해방을 맞이하고
서울에 있는 조선 전선 주식회사에 시험을 보고 입사하였지만
1946년 중앙극장에서 개최된 오케이 레코드가 주최 전국 콩쿨대회에서
박시춘.  김해송.  남인수 등의 심사를 받고
4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1등으로 당선되어 가수로 등장했다

 


오케이 레코드에 전속이 돼 
눈물의 오리정을 옥두옥과 듀엣으로 취입한후
불사른 일기장 등 수 많은 노래를 취입했다

1949년 서울 레코드가 창설되자 자리를 옮겨
마음의 사랑.  자명고 사랑.  제물포 아가씨 등을 취입했다

 

1950년에는 반야월이 남대문악극단을 창설하자
단원으로 활약하던 중
반야월이 작사한

울고 넘는 박달재를 고려레코드에서 취입하였다

 

 

그러나 이 노래 취입 한 달 만에 6.25전쟁이 터졌고
그는 부산으로 피난을 가서 쇼무대에서 노래를 불렀고
한때 국제시장에서

유신전기상회라는 상점을 차리고 장사를 하다가
도미도 레코드에서

물레방아 도는 내력.  향수 등 일대 히트곡을 내었고
다시 미도파 레코드로 옮겨가서

경상도 아가씨.  비에젖은 주막집 등을 내놓아
더욱 놓은 인기의 정상을 누리기도 했다

 

 

미도파 레코드에서 100여곡을 취입한 박재홍은
서울로 돌아와서 신신 레코드 소속이 됐는데
그 때 재정난으로 쓰러져 가는 신신 레코드를
유정천리를 힛트시킴으로 다시 일어서게 하였다

 

 

1960년대 오아시스 쇼라는 단체를 조직해서 단장으로 있으면서
흥행에도 열의를 보이기도 했다

1970년대부터는 주로 극장무대에서 활동했으며
1980년대 본격적인 TV쇼시대가 열리면서
원로가수격으로 방송출연도 활발히 했지만
1989년 3월 지병으로 향년 63세로 타계하였다

 


돌아오지 않는 강물처럼 세월은 흘러가 버렸어도
잊지못할 추억과 함께 그 노래를 불러준 가수 박재홍은
해방 후 작사가 반야월은 남대문 악극단을 창설해서
공연차 지방으로 순회 하던 중
단원들과 같이 충주행 버스를 타고 비 나리는 박달재를 넘던중
고개마루에서 버스가 고장이 나서 쉬게 됐는데

 

 


그 때 박달재 고개 마루에 있는 성황당 앞에서는
뜻밖에도 어느 농촌 부부의 애절한 이별 장면을 보고 만든
울고넘는 박달재를 불러 힛트시켰지만
박달재가 어디 있는지도 몰랐다고한다

 

6.25 전쟁이 나자 피난길에 경북 문경 쪽으로 피난을 가면서
피난민들이 울고넘는 박달제를 불러 같이 불렀지만
피난민들은 박재홍을 몰랐다고 전해진다

 

 

부산 피난시절 부산 정치파동으로 
딱벌떼. 해골단 등이 난무하던 시절에
국회의원들을 태운 버스가 기중기에 매달려 끌려가면서
뒤거래를 읊은듯이  가사 내용을 보면 알수 있듯이

물방아 도는 내력이 힛트하였다 


 


벼슬도 싫다 만은 명예도 싫어
정든 땅 언덕 길에 초가집 짓고
낮이면 밭에 나가 길쌈을 매고
밤이면 사랑방에 새끼 꼬면서
새들이 우는 속을 알아 보련다

 

울고넘는 박달재와 물레방아 도는 내력은 한동안 대유행을 했고
박재홍의 대표 곡이라 할수 있다

 

 

유정천리는 자유당 시절
해공 신익희 박사 유석 조병옥 박사등이 서거하고
국민들이 아주 슬픔에 잠겨있을 때
학생들이 가사를 바꾸어
뭐 조기선거 왠 말이냐 하면서
뭐 또 벽사지공 왠말이냐 해서
자유당에 비가 오고 민주당에 꽃이 핀다는 내용으로 불러 힛트했다

 

가련다 떠나련다 해공 선생 뒤를 따라
장면 박사 홀로 두고 조 박사도 떠나갔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당선 길은 몇 구비냐
자유당에 꽃이 피네 민주당에 비가 오네

 

부산에 부산 극장 공연을 가서 공연을 하든중
학생들이 그냥 그 가사 바꾼걸로 한번 하라고 소동을 해서
한번 제가 바꿔서 한번 부르고
전 관중이 아우성을 치는데 좋다고 해서 흥분에 취해 있다
공연을 마치고 나오다
길 모퉁이에서 몽둥이에 맞어 까무라 친적도 있다고 한다

 

3.15 부정선거로 4.19가 일어나고
학생들이 개사된 내용으로 노래를 부르며 행진을 하였고
이후 박재홍을 보면 저기 유정천리 온다고 놀리기도 했다고 한다

 

 

박재홍은
우리에겐 고유의 가요가 없다고 아쉬워 하고
그래서 건전한 창작 가요가 나오기를 염원하고
모방을 하는 가요에는 발전이 없다고 갈파하며
어지러운 가요계의 풍토를 개탄 하면서
유능한 가수가 나오기를 간절히 바라다
최갑식  은방울 자매  박경원 등 후배 가수를 마음껏 지원 하기도 했다

 

이제는 영원히 가버린 세월과 함께
청춘의 화려한 낭만과 감상이 번져있는 그리운 노래로
아직도 가슴속에 남아있는 박재홍의 노래를 감상해본다


유정천리

 

 

물방아도는내력

 

 

향수

 

 

홍도야울지마라

 

 

 

마음의 고향

 


 

 

황혼(黃昏)


 

 

박재홍 노래 모움 14곡

경상도 아가씨
그대는 아시나요
꿈에 본 내 고향
낙제과객
돌아 가자 하동포구
만리포 사랑
사나이 순정
유정천리
인생수첩
자명고 사랑
초가고향
혜숙아
휘파람 불며
울고 넘는 박달재
대동강 달밤

 

 

울고넘는 박달제

 

 

귀국선

 

 

유정천리 - 남백송

 

 

향수 - 김용임

 

 

 

출처 : 살핌과나눔
글쓴이 : 살핌과나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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