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따라 삼천리

[스크랩] 조선 제일의 한량 임백호와 평양기생 일지매

송명 2013. 2. 2. 00:21

조선 제일의 한량 임백호와 평양기생 일지매
 

 

임백호와 평양기생 일지매

 


백호 임제(白湖 林悌; 1549~1587)는 병마절도사 임진(林晉)의 아들이요 대곡 성운(大谷 成運)의 제자이다. 천하의 한량이요 기인(奇人)이며 풍류시인이었다. 조선 최고의 로맨티스트였다 할 것이다. 호남 선비들이 모두 당대의 등용문이던 사암 박순(思庵 朴淳)의 문하로 운집할 때 과학(科學: 과거공부)위주의 글에 뜻이 없었던 백호는 홀로 속리산에 은둔한 대학자 대곡을 찾았다.


대곡의 문하에서 남명 조식(南冥 曺植)을 비롯한 토정 이지함(土亭 李之菡), 손곡 이달(蓀谷 李達) 같은 석학들을 만났으니 그의 학문과 학풍을 가히 짐작할 것이다. 마음에 없던 과거지만 늦게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고 예조정랑(禮曹正郞)을 거처 평안도사(平安都事)가 되었으나 부임길에 황진이 묘에 술 한 잔 부어놓고 시 한수 읊은 것이 화근이 되어 파직되었다는 일화가 그의 풍류와 기품을 말해 준다.


“세상은 너무 추하지만 시가(詩歌)와 미녀(美女)는 사랑할만하다.”고 한 것은 평소부터 그의 지론이었고, “세상을 위하여 한 일이 없으니 나 죽거든 제사하지 말라.”고 한 것은 그의 유언이었다고 한다. 명문가의 자제로 태어난 그가 왜 세상을 추하게 보고 기인의 길을 걸었을까?


그는 사대사화(四大士禍)가 끝날 무렵에 태어나 당쟁이 태동하던 시기를 살면서 너무도 사악한 모습들을 듣고 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염세와 허무에 빠져 해학과 풍자로 세상을 희롱하며 농염(濃艶)한 시문과 수많은 일화들을 세상에 남겼을 것이다.


속리산에서 공부할 때의 일이다. 어느 화창한 봄날 충청관찰사의 아들인 귀공자가 속리산을 오르는데 행차가 너무 호화롭다고 했다. 끼가 발동한 백호가 노승 둘에게 먼저 정상에 올라가 바둑을 두고 있으라 했다. 그리고 자신은 봉우리 밑에 숨어서 옥퉁소를 불었다. 백호는 통소의 달인(達人)이었다.


귀공자가 산 중턱에 오르자 기막히게 아름다운 퉁소소리가 들리므로 안내하는 중에게 물었다. 그는 백호가 시킨 대로 “이 산에서는 청명한 날이면 청아한 퉁소소리가 들리는데 아직까지 아무도 그를 본 사람은 없다.”고 했다. 신비롭게 여긴 귀공자는 속리산(俗離山)이라더니 과연 이름 그대로 속세를 떠난 신선이 사는가 보다고 생각하며 오늘은 내가 꼭 만나보리라고 작심을 했다.


정상에 거의 오르니 허리에 옥퉁소를 찬 젊은이가 나와서 속인(俗人)은 이 이상 오르지 못한다고 막는다. 자기의 신분을 밝히면서 사정을 했더니 모두 이곳에서 기다리라 하고 한사람만 올라오도록 허락했다. 올라가 보니 신선으로 보이는 풍채 좋은 두 노인이 마주 앉아 바둑을 두다가 바라보더니 술부터 마시게 하라고 한다.


젊은이가 선주(仙酒)라고 쓰인 백자술병을 가지고와서 “선경에 오면 선주부터 마셔야 하는데 혹 술맛이 속세와 다르더라도 단숨에 마셔야한다.”고 했다. 귀공자는 몹시 역겨웠지만 자기도 신선이 되는가 싶어 단숨에 들이켰다. 그 술은 술이 아니라 백호가 미리 준비한 말 오줌이었다. 거짓 신선이야기로 실컷 놀려주고 내려 보낸 후에 배꼽을 잡고 시 한 수를 읊었다. “붉은 띠 화려한 미소년이여/ 진세 속의 기특한 남아로다./ 한 병 술로 만나고 헤어지니/ 속리산 구름이 만리로구나.”


이렇게 자유분방했던 백호는 당시에 벌써 자유연애사상을 가진 사람이었다. 남녀 간의 사랑은 하늘이 준 권리요 자연의 순리인데 공연히 윤리니 도덕이니 하는 이름으로 이를 억누르는 것이라 했다. 말없이 이별했다는 뜻의 무어별(無語別)이라는 그의 시가 평소 그가 가졌던 윤리관(倫理觀)을 잘 말해주고 있다.


무어별(無語別) 

열다섯 아리따운 아가씨                      十五越溪女

남이 부끄러워 말 못하고 헤어졌네         羞人無語別

돌아와 중문을 닫고서는                      歸來掩重門

배꽃 사이로 달을 보며 눈물 흘리네        泣向梨花月


월계녀(越溪女)란 중국 고대미인 서시(西施)가 월(越)나라의 시냇가에서 빨래하던 여인이었다 하여 미인을 지칭하던 말이었다. 사랑하는 남녀가 서로 만났지만 남을 의식하여 아무 말도 못하고 돌아와서는 대문 중문 다 닫아걸고 호젓한 뒤뜰에서 달을 바라보며 남몰래 눈물짓는 광경을 그리고 있다. 왜 그래야만 하는 것일까? 사랑하는 사이라면 순수한 자기감정을 자연스럽게 주고받아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그는 남을 의식하지 않고 자유롭게 살려했고, 타고난 풍채에 세상을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글재주와 뭇 기생들의 가슴을 태우는 음률의 달인이기도 했다. 그가 평안도사로 있을 때에 한우(寒雨)라는 명기가 있었다. 재색을 겸비한 아름다운 기생이어서 접근하려는 한량들이 많았지만 항상 차갑게만 대한다하여 한우라는 이름이 주어졌다고 한다.


백호의 호기심이 발동했다. 나에게도 찬비를 뿌리려나?. 술잔을 기우리며 시를 화답하다가 한우가 거문고를 타자 백호는 퉁소를 불었다. 항상 품에 지니고 다니던 옥퉁소였다. 한우에게는 자기의 음률을 알고 조화를 이루어주는 처음으로 만나보는 사내였다. 밤이 이슥해지고 취흥이 도도할 무렵 백호가 짐짓 이런 시조를 읊었다.


북천이 맑다커늘 우장 없이 길을 나니

산에는 눈이 오고 들에는 찬비(한우) 온다.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얼어 잘까 하노라.                    백호


자기에게도 찬비를 뿌리면 돌아가겠다고 한우의 속마음을 떠보려는 은연중의 협박이다. 깜짝 놀란 한우가 재빨리 화답한다. “얼어 자다니 그 무슨 말씀이요. 오늘 같은 날을 기다리며 장만해 둔 원앙새 수놓은 베개와 비취색 비단이불이 있으니 따뜻이 주무셔요.”하는 듯을 담은 시조이다.


어이 얼어 자리 무스일 얼어 자리

원앙침(鴛鴦枕) 비취금(翡翠衾)을 어디 두고 얼어 자리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녹아 잘까 하노라.                     한우


이렇게 해서 백호가 한우의 비단이불 속에서 뜨겁게 녹아 잤음은 물론이다. 그 후 백호가 평양을 떠날 무렵 친구들이 송별연을 베풀었는데 옆에 월선(月仙)이라는 아리따운 동기(童妓) 하나를 앉혔다. 잘 놀고 점잖게 자리를 뜨면서 어린 기생에게 부채 하나를 선물했다. 겨울에 웬 부채 선물? 그러나 그 부채에는 시 한 수가 쓰여 있었고 그 동기는 후일 그 글의 뜻을 새기고 평생토록 백호를 그리면서 항상 부채를 품에 지니고 다녔다고 한다. 그 시는 이러하다.


한겨울에 부채를 준다고 괴이하게 여기지 말라     莫怪隆冬贈扇枝

너는 아직 나이 어리니 어찌 알랴마는                爾今年少豈能知

임이 그리워 한밤에 가슴에서 불이 일어나면        相思半夜胸生火

유월염천의 무더위가 비길 바 아니니라               獨勝炎烝六月時


그러한 백호에게도 차마 접근하지 못한 기생이 있었다. 이름을 일지매(一枝梅)라 했고 평야기생 중에서도 으뜸가는 명기였다. 어찌나 지조가 굳던지 역대 감사들이  눈독을 들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백호가 어찌 호기심이 없었을까마는 직속상관인 현직감사가 애를 태우고 있는 판이니 한 거름 물러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파직되어 돌아와서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몇 해가 지나서 친구인 김계충이 평양감사로 나간다고 송별연이 벌어졌다. 술자리에서는 자연스럽게 평양기생 이야기가 나오고 일지매 이야기가 나왔다. 평양에 1년씩이나 있었는데 일지매 하나를 어쩌지 못한 자네도 한량이냐고 백호에게 비아냥이 쏟아졌다.


김계충이 호기를 부리며 내가 가서 일지매의 콧대를 꺾어 보이마고 했고, 백호는 그렇게만 한다면 내가 자네를 형으로 모시겠지만 성사가 안 되거든 나를 부르라 했다. 그러자 자존심이 상한 김계충은 내가 못 이루는 것을 자네가 이뤄낸다면 내가 자네와 일지매를 위하여 원하는 곳에 별서(別墅: 별장)를 마련해 주마고 했다.


김감사가 평양에 부임하여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회유와 협박을 거듭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백호에게 연통을 했다. 득달같이 평양으로 달려간 백호는 김계충은 만나지 않고 생선장수로 가장하여 일지매의 집을 찾았다. 생선을 몇 마리를 사주웠더니 이번에는 넉살도 좋게 날이 저물었으니 헛청에서라도 하룻밤 자고가게 해달고 떼를 쓴다.


따뜻한 봄날이니 춥지도 알을 것 같고 그의 집요한 청을 거절할 수도 없어서 하녀에게 저녁이나 대접해서 대문간 헛청에 자게 하라 했다. 밤은 깊어가고 달빛은 교교한데 잠이 안 와서 거문고 한 곡조를 탔더니 뜻밖에도 퉁소소리가 들려오지 않는가. 이상히 여겨 귀를 기우리니 틀림없이 헛청에서 나는 소리였다. 거문고소리를 나추고 자세히 들으니 보통의 솜씨가 아니었다.


생선을 살 때부터 옷은 남루해도 기품이 다르다 했더니 과연 보통 생선장수는 아닌 듯싶었다. 시험해 보려는 생각이 불현듯 들어 격조 높은 곡을 타 보았지만 퉁소소리는 더욱 흥이 실렸다. 혹시 하는 생각이 들면서 한우가 몇 번이고 거듭거듭 자랑하던 말이 떠올랐다. “자기의 거문고가 임백호의 퉁소에 힘입어 생전 처음으로 호흡이 일치하는 멋들어진 협주를 이뤄봤노라.” 고.


그때 연주했던 곡이 고려 때 정과정(鄭瓜亭)이 지은 충신연주지곡(忠臣戀主之曲)이라 했다. 가슴이 설�다. 그렇게 희귀한 곡을 지금 내가 연주해서 저 생선장수의 퉁소가 멋진 화음으로 호응해 온다면 그는 틀림없이 임백호일 것이다. 뛰는 가슴을 진정하고 호흡을 가다듬은 후에 그 곡조를 거문고에 싫어 타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멋진 화음을 이루는 퉁소소리가 밝은 달빛 아래 맑은 바람에 실려 하나가 된다. 바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월선이가 자랑하던 부채 생각이 나서 시로써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싶었다. 마루 끝에 나가 달을 우러러 보며 대문간을 향하여 한 구 읊었다. 그랬더니 대문간에서도 지체 없이 화답이 들려온다.


창가에는 복희씨 적 달이 밝구나.          窓白羲皇月        일지매

마루에는 태곳적 바람이 맑도다.           軒淸太古風        임백호


말이 떨어지자마자 곧바로 온 화답이 멋들어진 대구(對句)를 이룬다. 무엇을 더 망설이랴. 꿈속에서만 동경해 오던 그 임백호가 바로 자기를 찾아온 것이다. 일지매는 짐짓 시치미를 떼고 은근히 추파를 싫어 시 한 구를 더 보냈고 헛청으로부터 다시 환영의 화답이 왔다.


비단이불을 누구와 함께 덮을꼬?           錦衾誰與共        일지매

나그네의 베갯머리 한편이 비어 있네      客枕一隅空        임백호


버선발로 뛰어나간 일지매가 임백호의 손을 부여잡고 눈물을 쏟으며 앙탈을 한다. 서방님께서 어떻게 소첩을 이다지도 속이시옵니까? 백호는 태연이 응수한다. 일면식도 없는 자네가 내가 누구인줄 알고 서방님이라 하는가?  서방님은 백호영감님이 아니시옵니까?  허 내가 백호인 줄을 자네가 어찌 아는가?  음률을 안다는 소첩이 어찌 서방님의 퉁소를 못 알아보겠습니까?  과연 한량과 명기였다.


이렇게 해서 20여 년을 굳게 지켜온 난공불낙의 일지매 아성이 무너지고 꿈속을 헤매는 황홀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무렵 관아에서 기생점고가 있다는 통지가 왔다. 일지매는 믿는 구석이 있었던지 서방님을 홀로 두고 어찌 기생점고에 나가느냐고 응하지 않았다.


한편 평양감사 김계충은 일지매를 단념하고 백호에게 전갈한 후에 자기가 형이 될 날만을 고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일지매에게 정인이 생겨 기생점고에 안 나왔단다. 그렇게 도도하여 자기의 청을 일축했던 일지매가 한낱 생선장수와 정분이 났다는 것이 더욱 불쾌했다. 


당장 두 사람을 잡아들여 계하에 꿇리고 문초를 했다. 일지매가 아뢴다. “그리운 임을 홀로 두고 점고에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관명을 어긴 죄 응분의 처벌을 받겠나이다.” 노기등등한 감사가 불호령을 내린다. “저년을 형틀에 묶고 매우 처라.” 이쯤 되면 백호가 가만히 있을 계제가 못 된다.


“감사 어른께 생선장수가 한 말씀 아뢰겠나이다. 천기(賤妓)가 필부(匹夫)와 정을 통했으니 격에 어울리는 인생사가 아니오니까? 감사 어른께서는 노여움을 거두심이 옳을까 하나이다.” 그 늠름한 목소리와 당당한 논리가 범상한 생선장수가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생선장수의 고개를 들게 하고 자세히 보니 놀랍게도 자기의 친구 임백호였다. 이렇게 해서 남녀의 사랑은 깊어지고 사나이의 승부도 끝이 나서 김계충은 약속대로 대동강 변에 암담한 별장을 지어주고 그들의 단꿈을 이어가게 했다고 한다.


 


 



출처 : 태평양바다
글쓴이 : 마이31 원글보기
메모 :